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7 사건 (문단 편집) == 결과 == 이 사건으로 40~50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가와시마 신의 견해에 따르면, 32명.] 100~300명이 부상당했으며 1000명이 체포, 수배, 1000~1500명이 해고당했고 임상겸을 비롯한 여러 노동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북방철도공회와 우한철도공회가 폐쇄되었으며 과아주와 호남성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노동조직들이 대거 파괴되어 1921년 서기부 성립 이후로 고양되던 중국의 노동운동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1923년 2월 27일, 중국 공산당은 <2.7 대학살의 경과>를 발표, "노동자들에게 무기가 있었더라면 그들이 함부로 살육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겠는가?"라고 지적했고 등중하는 총파업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는 강대한 공산당 조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경한선에는 당원이 10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 파업의 결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한총공회의 파업준비부족과 총파업 명령 지연, 병사에 대한 설득 공작 부족, 즉 병사와 노동자가 서로 적대시하도록 방치했기 때문에 군벌은 이것은 이용하여 노동자를 살상할 수 있었다. 전신기관 장악 실패, 파업 개시 후 남북지방의 각 조합은 완전히 소식이 단절되어 총공회의 지휘는 사실상 강안 한 곳 이외에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당의 정치적 지도착오, 당은 우페이푸 군벌과 대립하고 있던 교통계 군벌을 이용하지 못했고 노동입법운동 과정에서 우페이푸가 주장했던 노동자 보호라는 기만정책의 본질을 사전에 폭로하지 못하고 단지 노동조합 조직에만 몰두했는데 이것은 기회주의적 약점이다." 이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과 [[코민테른]]은 [[우페이푸]]와 완전히 결렬하게 되었으며 직예군벌에 대한 반대투쟁을 강화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우페이푸가 경한철도노동자를 학살한 데 대해 노동계급과 국민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전국 인민과 노동계급이 단합하여 자유를 위해 투쟁하여 노동자를 압박하고 학살하는 군벌들을 타도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 [[코민테른]]과 국제적색공회도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옹호했다. 공산당의 군벌들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게 되면서 코민테른이 요구하던 [[중국 국민당]]과의 합작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던 공산당원들도 자신들의 소위 '계급적 역량에 대한 한계'를 절감함에 따라 '민주적 동맹자'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역사는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당시 얻은 교훈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중국 혁명의 적은 매우 강대하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노동계급은 군사작전에만 의존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다른 민주세력과 연대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인민대중과 함께 하여 가능한 모든 동맹자를 쟁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반제국주의, 반봉건군벌 혁명운동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188~189페이지 || 2.7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1923년 6월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운동과 국민당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1차 국공합작]] 지지로 입장을 대거 선회하는 한가지 계기가 되었고 통일전선의 형성으로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살아남은 일부 노동자들은 토비가 되어 산동성까지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임성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